홈으로 kj2000 즐겨찾기 KJ2000 트위터 바로가기
 
kj2000소개 만든이들 제휴문의 기사제보 명예기자모집
 

문화생활

 
 
HOME > 문화·생활
최영택의 중국문화기행-백탑의 요동 벌판, 요양(遼陽)을 가다(1-2)

≪열하일기≫의 기록에 의하면, 박지원은 요양에 도착하여 먼저 관우 사당인 관제묘(關帝廟)를 구경하고, 그 다음으로 백탑(白塔)을 보았고, 그 다음으로 백탑과 같은 위치에 있는 광우사(廣祐寺) 터를 보았다.

당시 박지원은 관제묘(關帝廟)에 대하여 가장 많은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그가 당시에 보았던 관제묘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이는 매우 번화한 장소였으며, 그 규모 또한 매우 컸다.(그림7)

자는 요양호텔의 종업원들과 젊은 학생들에게 관제묘에 대하여 물어보았지만, 이들은 모두 요양에 관제묘라는 곳이 있었는지 조차도 알지 못하였다. 하지만 공원 근처에서 만난 한 노인은 뜻밖에도 관제묘에 대하여 조금은 알고 있었다. 그 노인의 말에 의하면, 요양의 관제묘는 1960년대 문화혁명 때 철저하게 파괴되어 지금은 빈 터만 있을 뿐 사실상 모든 것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 노인은 귀중한 문화유산이 사라진 것을 매우 안타까워하였다.

박지원 당시의 관제묘는 더 이상 볼 수 없었지만, 필자는 다음날 요양박물관에서 당시 관제묘에 모셔져 있었던 관우상을 볼 수 있었다. 일부 훼손된 부분도 있었지만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었다.(그림8)

박지원 일행은 관제묘 구경을 마치고, 관제묘에서 반 리정도 떨어진 백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의 <요동백탑기>에서 백탑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백탑은 여덟 면으로 된 백색의 탑으로 13층에 높이가 70길이나 된다. ……… 요동이 왼쪽으로 푸른 바다를 끼고 앞으로는 큰 들판에 접해 있어서 거리끼고 막힌 것이 없어 천리가 아득하므로, 백탑은 바로 요동 벌판의 삼분의 일의 형세를 차지한 셈이다. 탑 꼭대기에는 세 개의 구리로 된 북이 설치되어 있고, 탑의 매 층의 추녀 모서리에는 물바가지 크기의 풍경이 달려 있어 바람이 불면 풍경 소리가 온 요동 벌판을 진동케 한다. ……… ”

필자가 묵었던 요양호텔은 백탑공원의 길 건너편에 있었으므로, 호텔 객실에서도 백탑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필자의 여행 상황이 박지원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기도 하다.

백탑이 위치한 곳을 지금은 ‘백탑공원’이라 부르고 있으며 연중 무료 입장이다. 해가 지면 백탑공원 앞에서 광우사 광장에 긴 도로는 거대한 야시장으로 바뀌는데, 박지원은 이렇게 요란한 광경을 사라진 관제묘에서 보았을 것이다.(그림9)


백탑은 불사리탑으로서 원래는 광우사보탑이라 불렀으나, 탑신에 흰색을 칠하였으므로 흔히 백탑으로 부른다. 높이 71미터로 중국 동북지방에서 가장 높은 탑이며, 중국의 76개 고탑 중의 하나로서 중국 6대 고탑에 속하며 중국의 국가급 문화재이다. 백탑의 건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대부분 요나라 때 처음 건립되었다가, 명나라와 청나라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보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박지원은 <요동백탑기>에서 백탑의 건축에 대하여 “세상에 전하기로는 당나라 장군 울지경덕이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치러갈 때 건축한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백탑의 원래 명칭이 ‘광우사보탑’이었다는 점을 보면, 백탑은 원래 광우사 경내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1780년 당시, 박지원은 백탑은 보았지만, 광우사는 이미 폐쇄되고 중들도 없었다고 기록하였다. 그의 <광우사기(廣祐寺記)>에는 이러한 대목이 있다.

필자는 백탑공원에서 백탑을 구경한 뒤, 공원 안의 작은 길을 따라 광우사에 이르렀다. 백탑과 광우사는 하나의 경내에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였지만, 광우사에 들어가려면 중국돈 50원짜리 입장권을 별도로 구입해야 했다.

광우사(그림10)는, 동한(東漢) 시대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후 초기에  건축된 불교 사원 중의 하나로서 중국 국가 AAAAA급 문물이다. 금, 원, 명, 청나라 등의 각 왕조의 지속적인 보수와 개선 공사를 거치면서 면적 9만 평방미터에 200칸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발전하여 중국 동북지방의 최대 불교성지가 되었다.
1682년 강희제는 친히 광우사를 찾아 <광우사>라는 시(詩)를 하사하였고, 1842년 도광황제 때에는 부분적으로 보수하였으나, 1898년 러시아의 철도 건설로 광우사는 부분적으로 훼손되었다.

이후 광우사는 1900년 7월에 의화단의 활동 본거지로 사용되다가, 그해 9월 28일 러시아 군대가 의화단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불에 타서 폐허로 변하였다. 광우사터는 100년 이상 방치되어 오다가, 2002년 6월 중건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필자는 광우사 관련 기록을 살펴보다가,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박지원이 광우사를 찾은 것은 1780년 8월로 건륭제가 중국을 통치하던 태평성세였고, 광우사가 불타 없어진 것은 그 후 120년이 지난 1900년 9월인데, 박지원은 무슨 이유에서 ‘지금은 절이 폐하여지고 중도 없다(今廢無僧)’라는 기록을 남겼을까? 당시 박지원은 자신이 목격한 광우사의 모습이 어떠했기에 이러한 기록을 남겼을까? 건륭제 시기, 즉 1780년대를 전후해서 광우사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하였던 것일까?

≪열하일기≫의 <광우사기>에 실린 “금폐무승(今廢無僧)”이라는 대목을 김혈조 교수(영남대 한문교육과)는 “지금은 절집도 없어지고 중도 없다(돌베개출판사, 2009년판)”라고 번역하였는데, 이 역시 당시의 광우사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과장되게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200칸에 달하는 공간으로 이루어진 광우사라는 대형 건물이 모두 없어진 것 아니라, 무슨 이유에서인지 알 수는 없지만, 사찰은 일시(一時) 폐쇄되고 그곳의 승려들도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된 상황이었던 것으로 필자는 추측하고 있으며, 박지원 역시 이러한 상황을 보고 “지금은 폐쇄되어 중들이 없다(今廢無僧)”라는 의미로 기록하였을 것이다.

필자는 수년간 중국을 여행하면서 현지의 박물관들을 빠짐없이 들러 본다. 이미 습관이 되었다고 하는 게 좋겠다. 박물관은 크건 작건 그곳에 가면 볼만한 것이 틀림없이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의 박물관은 아무리 작은 시골의 박물관일지라도 귀중한 유물들이 꼭 전시되어 있다.

역사가 길고 땅이 넓어서 많은 유물들이 지금도 발굴되고 있고, 또 장차 얼마나 많은 유물들이 땅속에서 발굴될 지 중국인 자신들도 모른다 한다. 많은 유물들이 시도 때도 없이 발굴되다 보니, 중국의 박물관들은 자료 발굴과 연구, 정리, 전시 등에 이미 매우 뛰어난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이유로 필자는 오래 전부터 중국의 박물관을 부러워하고 있다.

박지원의 행적을 살펴보는 계획과는 별도로, 이번 여행에서도 요양박물관을 방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폐허 같은 요양역의 모습과는 달리, 요양박물관(그림11)은 매우 훌륭한 외모와 전시품들로 필자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에 충분하였다. 특히 고구려와 발해 관련 유물과 역사자료들을 별도의 전문 코너에 배치한 것은 퍽 인상적이었다.

이번 요양박물관 참관에서 필자를 가장 놀라게 한 전시품은 10톤이 넘는 거대한 동전 덩어리 실물이었다. 2008년 건축 공사를 위하여 땅을 파다가 발견되었다는 이 동전 덩어리는 한나라에서 금나라에 이르는 동전 꾸러미의 무더기인데(그림12), 북송 시대의 한 무역회사 또는 무역업자의 건물이 무너지면서 금고(돈을 보관하던 창고)도 그대로 함께 땅에 매몰된 것이라고 한다. 이 많은 돈을 잃어버린 주인은 누구이며, 이 돈을 모으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땀을 흘렸을까? 그 당시 왜 다시 파내지 못했을까? 어쩌면 그 주인도 땅에 함께 묻혔을지도 모를 일이다. 괜스레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 인간은 역사에서 겸손함을 배워야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차지하지 위해 싸우고, 내어 주지 않으려 버둥거리다, 세상을 떠날 때에는 모든 것을 역사에 내주어야 하는 인간은 언제나 빈손인 것을.

박물관 주변으로는 골동품 시장(그림13)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각종 생활 도구에서 고서적, 청동기, 옥기 등 다양한 골동품들이 거래되고 있었다. 여기에서 필자는 요양의 역사 기록인 현지(縣誌)를 직접 만들어 팔고 있는 미태원(米泰元)이라는 늙은 화가를 만났다. 그가 직접 그리고, 직접 손으로 쓴 <요양회고(遼陽懷古)>라는 작은 책자는 이 글을 쓰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복사하여 묶은 100쪽 짜리의 얇은 책이었지만, 그림과 글 속에는 노화가의 역사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필자는 일단 여행지에 도착하면 언제나 맨 먼저 하는 일이 있다.
그 도시의 지도를 구입한 다음, 인력거나 삼륜차를 대절하여 그곳의 기차역, 버스터미널,  상업 중심지역과 번화가(중국에서는 보행가(步行街)라고 부름), 고문화 거리, 대형 마트 등을 돌아보고 사전에 위치를 확인한다. 물론 출발 전에 철저하게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지에 도착하여 실제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여행에 더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중국 각 도시의 지도는 매우 정확하게 제작되어 있어서, 길 찾는데 더할 나위없이 유용하다. 때문에 필자는 언제나 중국의 지도를 절대 신뢰한다.

이번 요양 여행에서도 이러한 일은 빠지지 않았다. 인력거를 타고 작은 도시를 한 바퀴 도는 일을 1-2시간 정도에 우리 돈 4-5000원 정도면 충분하다. 인력거부에게 현지 사람들이 자주 가는 여행지와 식당, 호텔 등에 관한 생생한 정보를 쉽게 들 수 있다. 특히 관광지도에는 나와 있는 않는, 현지인들만이 아는 곳을 찾아가는 것은 또 다른 수확이라 할 수 있다. (끝)

게시글을 twitter로 보내기 게시글을 facebook으로 보내기

 

동심-childlike  이기원, 최재영 2인 초대전동심-childlike 이기원, 최재영 2인 초대전
[우리 동네 명배우 열전] - 첫 번째 <늙은 코미디언 이..[우리 동네 명배우 열전] - 첫 번째 <늙은 코미디언 이..
[우리 동네 명배우 열전] - 두 번째 < 잘 자요, 엄마!&g..[우리 동네 명배우 열전] - 두 번째 < 잘 자요, 엄마!&g..
[우리 동네 명배우 열전] - 세 번째 <동물원 이야기>[우리 동네 명배우 열전] - 세 번째 <동물원 이야기>
다전 송희자의 겨울꽃차(백화차)이야기다전 송희자의 겨울꽃차(백화차)이야기
다전 송희자의 가을꽃차(국화차) 이야기다전 송희자의 가을꽃차(국화차) 이야기
다전 송희자의 여름 꽃차 이야기(장미꽃차)다전 송희자의 여름 꽃차 이야기(장미꽃차)
다전 송희자의 꽃차를 마시는 여인다전 송희자의 꽃차를 마시는 여인
최영택의 중국문화기행-의무려산의 산신(山神)이 사는 곳, ..최영택의 중국문화기행-의무려산의 산신(山神)이 사는 곳, ..
최영택의 중국문화기행-의무려산의 산신(山神)이 사는 곳, ..최영택의 중국문화기행-의무려산의 산신(山神)이 사는 곳, ..
[HIFI 길라잡이] 오디오의 음악특성 2부[HIFI 길라잡이] 오디오의 음악특성 2부
[HIFI 길라잡이] 오디오의 음악특성[HIFI 길라잡이] 오디오의 음악특성
여행이야기 - 신혼여행을 계획하는 커플들....여행이야기 - 신혼여행을 계획하는 커플들....
최영택의 중국문화기행-백탑의 요동 벌판, 요양(遼陽)을 가..최영택의 중국문화기행-백탑의 요동 벌판, 요양(遼陽)을 가..
최영택의 중국문화기행-백탑의 요동 벌판, 요양(遼陽)을 가..최영택의 중국문화기행-백탑의 요동 벌판, 요양(遼陽)을 가..
 
 
 1  2  
and or
 
현네트워크 (우) 61413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로1 3층. |  등록년월일 : 2010년07월10일  등록번호 : 광주 아 00057호
청소년 보호정책 (책임자 : 고승현 편집인)  사업자등록번호 : 408-81-40883   발행·편집인 : 고승현   
Copyright(c) 2010 KJ2000. All Rights Reserved.   TEL. 062-227-2850   FAX. 062-227-2849
메일: webmaster@hyunne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