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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택의 중국문화기행-의무려산의 산신(山神)이 사는 곳, 북진묘에 가다(1부)

열하일기 따라걷기] 1780년 7월15일자

의무려산의 산신(山神)이 사는 곳, 북진묘에 가다

북진시(北鎭市)는 요령성 금주시 관할의 작은 도시이다. 북진이라는 명칭은 이곳에 위치한 의무려산(医巫闾山)에서 유래하였다.

≪주례(周礼)≫의 기록에 의하면,
“동진(东镇)은 청주(青州)의 기산(沂山)(지금의 산동성 유방시 임구현),
서진(西镇)은 옹주(雍州)의 오산(吴山)(지금의 섬서성 보계시),
중진(中镇)은 기주(冀州)의 곽산(霍山)(지금의 산서성 임분 곽주시),
남진(南镇)은 양주(杨州)의 금계산(金稽山)(지금의 절강성 소흥 회계산),
북진(北镇)은 의무려산(医巫闾山)이며,이를 모두 진산(镇山)이라 부른다.”라고 하였다.

진산(镇山)이란, 도읍지나 각 고을에서 그곳을 진호(鎭護)하는 주산(主山)으로 정하여 제사하던 산을 가리키는 말이다. 북진이라는 명칭은 북방의 진산(镇山; 북방을 수호해주는 의무려산)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북진은, 금(金)나라 때부터 청나라 말까지 광녕(广宁)이라 불렸으며, 1913년에는 호남성의 광녕현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북진현으로 개칭되었다. 그후 1995년에 북진현은 북녕시(北宁市)로 개칭되었으나, 2006년에는 다시 ‘북진시(北鎭市)’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현재 인구는 53만 명 정도이며, 이중 62%인 32만 여명은 만주족이다.
북진시는, 대시진(大市镇)、라라보진(罗罗堡镇)、상흥점진(常兴店镇)、정안진(正安镇)、여양진(闾阳镇)、중안진(中安镇)、요둔진(廖屯镇)、조둔진(赵屯镇)、청퇴자진(青堆子镇)、고산자진(高山子镇)、구방자진(沟帮子镇) 등 모두 11개의 진(鎭)을 관할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상흥점、여양、중안 등 세 곳은 ≪열하일기≫ 여정의 경유지이기도 하다.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의 1780년 7월 15일(양력 8월 14일)자 기록에 이렇게 적고 있다.

“ 박래원, 태의 변관해, 주부 조동달과 함께 새벽을 타서 소흑산(小黑山)을 출발, 중안포(中安浦)까지 30리를 가서 점심을 먹고 또 먼저 출발했다. 구광녕(舊廣寧)을 지나 북진묘(北鎭廟)를 구경하고 달빛을 타고 40리를 걸어 신광녕(新廣寧)에서 묵었다. 북진묘를 구경하기 위해 왕복 20리를 돌아서 더 걸었으니 오늘은 모두 90리를 걸은 셈이다. …… ”

이 기록을 보면, 박지원이 몇몇 일행과 함께 무더위를 피해 새벽 일찍 길을 나서, 중안포에서 점심을 먹고 또 다시 먼저 출발하여, 북진묘를 구경하고 밤늦게야 신광녕에 도착하여 숙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박지원의 이동 경로를 정리해 보면 아래 지도와 같다.(그림1)



박지원은 전날인 7월14일 흑산에 머물면서 몇몇 다른 일행들과 북진묘에 가기로 이미 약속하였다. 이때문에 박지원은 새벽을 타서 다른 일행들보다 일찍 출발하고, 점심 후에도 먼저 길을 나섰다. 북진묘는 사절단의 이동 경로에서 벗어난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박지원이 사절단의 전체 일정과 이동 경로에는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북진묘를 구경할 개인적인 시간을 확보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을 것이다.

박지원은 <북진묘기>라는 글에서 북진묘에 관하여 매우 상세하게 기록하였는데, 이는 그가 북진묘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 …… 북진묘는 의무려산(醫巫閭山) 아래에 있다. 수많은 의무려산 봉우리들이 마치 병풍을 둘러친 듯 에워싸고 있다. 앞으로는 요동 벌판이 펼쳐지고, 오른쪽으로는 푸른 바다가 두르고 있으며, 광녕성을 무릎앞에 어루만지고 있다. 광녕성의 수많은 집에서 나오는 푸른 연기가 하나의 띠를 만들어 감돌고, 층탑 한 쌍은 허옇게 솟아있다. …… ”

이 기록에서 언급한 ‘층 탑 한 쌍’이란 현재의 숭흥사(崇興寺) 쌍탑(雙塔)을 가리키는데, 숭흥사 쌍탑과 의무려산에 관한 이야기는 일단 북진묘 이야기 다음으로 미룬다. 참고로 북진의 주요 관련 지점을 지도에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그림 2)

이처럼 박지원이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사절단 본대에서 이탈해 가면서까지 찾아가 보고 싶어 했던 북진묘, 필자 역시 이러한 북진묘에 대한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필자는 2010년 7월 27일 12시 20분 흑산(黑山)에서 버스로 터미널을 출발하였다. 시골 버스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손님을 태우기도 하고 내려 주기도 하며, 박지원 일행이 점심을 먹었다는 중안포(지금의 중안진)라는 시골도 경유하였다.
230년 전 박지원 일행이 지났던 크고 작은 촌락들은 현재 중국의 102번 국도와 그 방향이 일부 겹치기는 하지만, 현재의 도로망과 다른 곳에 위치한 지명들도 상당히 많았다.

흑산에서 중안포까지는 지금의 거리로 약 15km이므로 박지원이 기록한 30리와 거의 일치한다. 물론 230년 전 박지원이 걸었을 코스와 지금의 도로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버스는 이렇게 약 32km를 달린 후 1시간 쯤 후 북진터미널에 도착하였다.
박지원 일행은 먼저 광녕(지금의 북진시내)에 도착하였다. 필자도 버스에서 내려 곧장 시내로 걸어 들어갔다. 시내의 모습은 이미 현대화된 상가와 건물들로 여느 도시와 별반 다르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과 노점상들로 매우 떠들썩하였다.

박지원은 당시의 광녕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 …… 양쪽 겹문으로 들어가 시장 점포들을 뚫고 지나가 보니, 그 번화함이 요동에 못지아니 하였다. 영원백 이성량의 패루가 성 북쪽에 있다. …… 성은 이중으로 되어 있는데, 안쪽 성은 완전하였지만 바깥쪽 성곽은 많이 허물어져 있었다. 성안의 남녀들이 집집마다 나와서 구경을 하고, 시정의 떠돌이들까지 떼로 몰려나와 말머리를 에워싸는 통에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

필자가 목격한 광녕(지금의 북진시)의 모습도 박지원의 기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길의 중간에는 이성량 패방(그림 4)이 세월의 무게에 눌려 힘겹게 서있었다. 이 패방은 명나라 만력 8년, 즉 서기 1580년 명나라 신종이 요동총병 이성량(1526-1615년)의 공로를 표창하고자 세운 것이다. 당시 이성량은 동북의 여진족들을 관할하는 요동 지역의 총사령관이었으며, 청나라의 누루하치도 한때 그의 부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이성량은 30년 동안 요동지방에 근무하면서 10여 차례 여진족을 진압하는 등 동북지방의 안정에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자신의 공만을 믿고 교만하고 사치스런 생활을 하다가 명 만력 36년에 파직되었다. 그후 이성량은 만력 46년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한편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파견되어 왜구를 물리치는데 힘을 보탰던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은 이성량의 장자(長子)이다.

패방은 어두운 자색의 침적사암으로 건축되었으며, 높이 9.25m, 너비 13.1m이다. 보존 상태가 비교적 좋은 편이라고 하지만, 이미 검게 변한 패방의 기둥에는 쓰레기가 쌓여있고 광고문까지 적혀있었다. 점포의 화려한 간판들의 위세에 밀려 패방의 웅장함은 그 빛을 잃은 지 오래되어 보였고, 심지어는 초라하기까지 해보였다.

박지원 일행은 이 패방을 통과하여 번잡한 길을 지나던 중 많은 구경꾼들로 인해 진행이 지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바람에 박지원 일행은 성 밖 관제묘에서 펼쳐지고 있던 연극 공연은 보지도 못하고, 북진묘를 향하여 바쁜 길을 재촉하였다.

이곳은 지금도 북진시의 번화가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이성량 패방을 지나면 ‘유주중진(幽州重鎭)’이라는 옛광녕의 고루(鼓樓)가 나타난다. 보수공사 중이어서 직접 올라가 볼 수는 없었다. 주위로는 시골 장터와 같은 시장이 길게 형성되어 있었다.(그림 5)
뭘 좀 사 먹을까 망설이다 그냥 포기하고 말았다. 바람이 많이 불고 먼지가 날리는 날씨이어서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음식 사먹는 일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번화가를 한 바퀴 돌고나서 북진묘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15분 정도 외곽으로 달리다보니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북진묘 입구까지 5분 정도를 걸어가면서 준비해 간 복숭아와 빵으로 점심을 대신하였다. 황량한 느낌마저 드는 길을 따라 걸으니 곧 북진묘 패방이 보였다.

박지원은 북진묘의 입구에 도착하여 첫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 …… 북진묘 앞에는 문이 다섯 개인 패루가 서 있는데, 순전히 돌로만 시렁을 올려 기둥, 서까래, 기와, 추녀가 모두 나무 하나 쓰지 않았으며, 높이가 네다섯 길이다. 그 구조의 기술과 새기고 조각한 기교가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 만든 것 같지 않았다. 패루 좌우에는 높이가 두 길쯤 되는 돌사자가 있다. 사당의 문부터 흰색의 돌로 층계를 만들었고, 문 왼쪽에는 절이 있고, 마당에는 두 개의 비석이 있다. …… ”

옆의 사진(그림 6)을 보면 박지원이 매우 세밀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묘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230년이 지난 지금의 북진묘 패방은 아랫부분을 쇠줄로 감아 세월의 무게를 힘겹게 버티어 내고 있었다.
필자는 매표소에서 입장권(중국돈 20원)을 구입하였다. 입구에는 두 명의 관리원이 있었는데, 한 명은 표를 받고, 다른 한 명은 바로 옆에서 검표하였다. 검표하는 여자 관리원은 거의 눕다시피한 자세로 의자에 기대어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표의 귀퉁이를 찢어 검표하였다. 중국이 세계 BEST 국가가 될 수 없는 이유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정문을 통하여 북진묘 경내로 들어갔다. 사람의 그림자를 찾아 볼 수 없었다.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북진묘의 분위기를 더욱 황량하게 하였다. 230년 전 박지원 일행은 80리 길도 멀다하지 않고 찾아왔지만, 지금은 찾는 이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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